모두를 위한 생명공학 리포트 ①
생명을 다시 쓰는 도구, 유전자가위
고선아 대표(길물빛콘텐츠연구소, 前 동아사이언스 콘텐츠본부장)
질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만 골라서 잘라 없애 치료할 수 있다면?
유전자를 미리 교정해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면?
미래에나 가능할 것 같던 상상 속 모습이 빠르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 기술은 ‘유전자가위’다. 유전자가위가 이끄는 생명공학의 혁신은 개인의 삶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유전자가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뜨겁다. 특히 지난해 세계 최초
로 유전자가위를 이용해 희귀질환을 치료한 사례가 나오면서 유전자가위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아기를 살린 맞춤형 유전자 치료
작년 12월, 학술지 네이처가 발표한 2025년 올해를 빛낸 인물 10명 중에는 한 살이 갓 넘은 아기가 있었다. 바로 세계 최초로 유전자편집기술을 이용해 희귀질환을 치료받은 ‘KJ 멀둔(이하 KJ)’이다.
KJ는 ‘중증 CPS1(카르바모일 인산합성효소) 결핍증’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 병을 가진 사람은 유전자 돌연변이 때문에 체내에서 꼭 필요한 단백질인 CPS1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 몸에 질소 화합물이 분해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독성이 강한 암모니아가 쌓여 뇌와 간에 심각한 손상을 일으킨다. 아기 환자 중 절반은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할 정도로 치명적인 질환으로, 살아남더라도 심각한 뇌손상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CPS1 결핍증 환자는 간 이식을 통해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간 이식은 매우 큰 수술로, 일정한 나이를 지나 신체가 안정된 상태여야 가능하다. 즉, 어린 아기가 간 이식 수술을 받기에는 위험도가 너무 높다. 이에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과 펜실베니아대학교 등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은 간 이식이 아닌 유전자가위를 이용해 KJ 치료에 나섰다. 아기 몸속에서 확인된 특정 CPS1 변이 유전자를 잘라내고 제대로 기능하는 유전자로 바꾸는 치료법을 개발한 것이다. KJ는 생후 6개월이 넘어선 2025년 2월 말부터 치료를 시작해 3월, 4월까지 총 세 차례에 걸쳐 치료를 받았고,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큰 부작용 없이 상태가 호전되어 2025년 6월 퇴원할 수 있었다.
KJ의 사례는 2025년 5월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 발표되며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맞춤 치료 분야에서 유전자가위를 이용한 유전자편집기술의 잠재력을 실제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이 치료법의 효과를 완전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더 장기간의 추적 관찰이 필요하다”고 밝히면서도 “수십 년 동안 이야기되어 온 유전자 치료의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유전자가위 시대를 연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가위’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특정한 DNA 부위를 정교하게 잘라내 없애거나 교체하는 기술이다. 1세대 징크핑거(ZFN), 2세대 탈렌(TALEN)에 이어 3세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로 발전해 왔다. 1, 2세대 유전자가위는 표적이 되는 DNA 부위를 찾는 단백질과 가위 역할을 하는 효소가 핵심이다. 따라서 단백질을 합성하는 게 중요한데, 그 과정이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드는 등 단점이 많았다. 이에 비해 3세대 CRISPR 유전자가위는 세균에서 찾은 면역체계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이전 유전자가위와 큰 차이점을 가진다.
‘CRISPR(크리스퍼)’라는 이름은 ‘주기적인 간격으로 분포하는 짧은 회문구조의 반복서열(Clustered Regular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의 약자다. DNA는 A, T, G, C로 표현되는 4종류의 염기들이 짝을 이뤄 배열되는데, 크리스퍼는 이 염기서열이 역순으로 배치돼 앞뒤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똑같은 구조다. 이런 구조를 ‘회문구조’ 또는 ‘팰린드롬’이라고 하는데 ‘기러기’, ‘토마토’, ‘별똥별’도 회문구조의 한 예다.
크리스퍼는 1987년 대장균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이후 세균이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 갖고 있는 일종의 면역체계라는 것이 밝혀졌다. 세균은 특정한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그 바이러스의 DNA 중 일부를 자신의 유전체에 저장한다. 이때 바이러스의 DNA가 저장되는 곳이 바로 CRISPR다. 이후 똑같은 바이러스가 다시 침입하면 CRISPR에 저장해둔 유전정보를 활용해 바이러스에서 일치하는 DNA를 찾아 잘라내서 세포를 보호한다. 이 원리를 이용한 것이 바로 CRISPR 유전자가위다
과학자들은 꾸준한 연구를 통해 CRISPR의 발현 과정에 ‘캐스9(Cas9)’이라는 단백질이 관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드디어 2012년, 제니퍼 다우드나 박사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박사는 이를 바탕으로 ‘CRISPR-Cas9’ 유전자가위를 개발한다. 가이드RNA와 Cas9 단백질로 이루어진 구조로, 가이드RNA가 표적을 찾아내면 캐스9이 가위 역할을 하는 원리다.
이들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노벨화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당시 노벨위원회는 유전자가위를 ‘생명을 다시 쓰는 도구’라고 표현하며, “이 기술을 이용해 앞으로 유전 질환을 치료하는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CRISPR 유전자가위를 기반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한 기술도 계속 등장하고 있다. CRISPR-Cas9 은 유전자를 자르는 과정에서 DNA 이중가닥을 모두 절단한다. 그러다 보니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절단된 곳에서 오류가 생겨 DNA의 삽입과 삭제가 무작위로 일어나는 등의 단점도 있었다. 이에 DNA를 한 가닥만 잘라 교정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 바로 2019년 네이처 논문을 통해 발표된 ‘프라임 편집(Prime editing)’ 기술이다. 이 기술을 개발한 데이비드 리우 박사는 앞서 소개한 KJ 멀둔 치료에도 참여했는데, 이때도 CRISPR 유전자가위를 기반으로 하는 유전자편집기술을 이용했다고 밝혔다.
유전자가위로 식량 문제 돌파구 찾는다
CRISPR 유전자가위는 이전 세대에 비해 표적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인식하면서도 실험 설계와 준비가 수월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작물과 축산 등 식량과 관련된 분야에서도 유전자편집기술을 이끄는 강력한 도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유전자를 교정해서 병충해나 기후변화에 강한 작물을 개발할 수 있고, 식품의 영양성분을 강화하거나 보관에 강하도록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2021년 일본에서는 CRISPR 유전자가위를 이용해 수면 촉진과 불안 감소 효과가 있는 물질을 더 많이 생산하는 토마토가 판매되기 시작하며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 국립수산과학원에서도 2021년 유전자가위기술을 이용해 광어의 근육량을 높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올해 초에는 카이스트와 경상대 공동연구팀이 CRISPR-Cas9을 이용해 ‘까마중’이라는 잡초에서 피임약이나 호르몬 치료제의 필수 원료를 생산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근육발달 유전자를 유전자가위로 교정한 말,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저항력을 가진 돼지 등 전 세계적으로 유전자가위를 활용한 작물과 가축 관련 연구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유전자가위는 자체 유전자를 잘라내 교정한다는 점에서 유전자변형기술과 차이점을 가진다. 즉, 유전자변형기술은 원래 없던 외래 유전자를 넣어 원하는 형질을 발현시킨다. 반면 유전자가위는 자신의 유전자를 잘라내 교정하기 때문에 외래 유전자가 남지 않는다. 유전자가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식량과 작물 등을 개량하는 데에 주로 유전자변형기술이 쓰였지만, 지금은 유전자가위를 이용한 연구도 활발하다.
유전자가위, 미래를 어떻게 바꿀까?
생명공학의 혁신을 이끌고 있는 유전자가위지만 해결해야 할 숙제도 많다. 기술적으로 정확도를 높이고 장기적인 부작용을 줄여야 하는 것은 물론, 윤리적으로는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가 논쟁거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8년 11월, 당시 남방과학기술대학교의 허첸쿠이 교수는 세계 최초로 유전자가위를 이용해 에이즈 바이러스에 면역력을 가진 아이를 탄생시켰다고 발표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앞서 소개한 KJ 멀둔은 아기 몸의 세포 속 유전자를 잘라내는 ‘체세포 유전자편집’으로, 수정된 정보가 후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하지만 허젠쿠이 교수는 수정된 배아 상태에서 유전자를 교정하는 ‘생식세포 유전자편집’을 진행했다. 이 경우 수정된 유전 정보가 후손에게도 전달된다. 게다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기를 편집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당시 윤리적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당시 이 일로 허젠쿠이 교수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2022년 출소했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는 걸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유전자가위도 그 양면성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생명공학의 혁신 기술을 규제 안에만 가둬둘 수도 없다. 난치병과 식량문제 등 인류가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유전자가위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다. 기술의 악용이나 오용에 대한 우려도 계속 이야기될 것이다. 유전자가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투명한 정보 공유, 그리고 활발한 소통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이유다.